1932년 신학지남에 4회에 걸쳐서 게재되었던 영계 길선주 목사에 관한 짧은 전기. 길 목사 생전에 쓰여진 것으로 길 목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개신교의 기원을 파악하고, 오늘날 개신교의 신앙 생활의 기원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원문은 한자어와 문어체로 작성이 되어, 그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아래의 글은 내용을 파악하기 쉽게 한자 표기를 한글로 바꾸고, 뜻을 파악하기 어려울만큼 옛스러운 말들은 현대적 표현으로 바꿔봤다. 파악하지 못한 글들은 ○등으로 표시해뒀다.

원문은 DBPIA에서 얻었는데, 원문 PDF의 소유가 dbpia에 있는 듯 하여 따로 올려놓지는 못하고 링크만 아래와 같이 연결해 둔다. 내가 옮긴 것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므로 원문과 대조하여 보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영계선생소전(상) DBPIA 링크


영계선생소전(상)

김린서

서언

영계 길선주 목사는 조선 예수교 최초의 목사이시면서 조신 예수교 건설 시대의 위인 중 한 분이시다. 선생의 인격과 덕망은 나를 포함한 후진들의 모범이 되시며, 선생의 신앙과 성경학은 백세의 사표가 되신다. 선생의 목회 하에 배출한 목사와 장로와 교사는 백여 명이고, 선생의 손에 세례를 받은 자는 수천이며, 선생의 전도에 구도한 자는 수만을 헤아린다.

선생께서 비록 예순을 넘기셨으나,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나오는 힘과 왕성한 정력은 오히려 청년을 능가하여 주님의 진영의 노장으로 지금도 조선 각지를 다니시며 부흥회를 인도하고 계시니, 선생께서는 여전히 장래를 위해 쏟을 힘이 넘치신다. 나 또한 ○서(해독불가) 에 머무른 지 수 년, 선생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여러번 선생을 모시는 기회가 있었다.

조선 초기교회를 기념하기 위하여 선생께서 쓰신 글들을 편수하고 선생의 전기를 기록할 뜻이 있었으나, 여전히 복음의 노전사로 남정북벌의 도상에 계신 선생은 물러나서 저술하실 뜻이 없으시고 (확실치 않음), 아직도 장래를 바라보고 계신 선생의 전기를 저술하는 것 또한 아직 이른 계획이라 이렇게 소전이라도 쓰려고 펜을 들었으니, 나의 졸필이 선생의 위대한 업적에 흠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둔다.

1. 선생의 출생과 소년시대

선생은 1869년 3월 15일 (음력 기사년 2월 2일)에 안주성내의 후장동에서 출생하시니 부친은 길봉순씨이시고 모친은 나씨 부인이신데, 그 가정이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유복한 가정이었다. 선생께서는 어려서부터 영특한 기운이 나타나셔서 가정과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셨고, 7세부터 16세까지 한학자 정모씨에게 한학을 배우셨는데, 선생이 어려서부터 사고력과 정서에 빼어남이 있었다.

8세가 되던 해, 어렸을 때 떠난 옛집 앞을 지나다가 옛정을 잊지 못하여 눈물을 머금으시고 사람의 일에 정하여 진 것이 없음을 탄식하였다. 하루는 여러 동무들과 더불어 뜰밖에서 노시다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이 만물의 모양을 띠며 오가는 것을 바라보고, 아이들이 그 구름을 지목하여 저것은 네것이고 그것은 내것이다 하면서 다투고 이야기하는 동안에 구름이 서풍을 타고 날아가버렸다. 이것을 보고 다른 아이들은 무심하였으나, 선생은 눈물을 뚝뚝 흘리시며 우시니 다른 아이들이 우는 이유를 물었다. 선생께서 대답하시니, "사람이 지상에서 내것 네것하며 욕심내어 얻으려고 하는 부귀가 저 떠가는 구름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이 세상의 무상함이 슬프지 않으냐?"하셨다. 이처럼 선생께서는 어려서부터 종교의 소질이 발로되었었다.

선생의 총명하심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라12살때에 "十指不動衣盈籍"라는 제목으로 한시를 지으시니,


莫作農人婦
年年若如此
玉手任辛苦
芳心怨八字
靑樓誰家女
夜夜搗鍊聲

(한시까지 해석할 능력은 못되어 그대로. 단지 6행의 한시가 있나 싶은 생각이... 고등학교 졸업한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

이라하여 글가르치는 선생을 놀라게 하셨다.

14살에는 "圖窮匕首現"라는 제목으로 시를 읊으셨으니,


江由一幅劒光起
爾則今朝白帝子

라 하셨다. 선생은 이와 같이 어려서부터 시재에 빼어난 것보다도 그 핏줄에는 영걸스러움은 피가 뛰고 있었다.

선생께서는 11세에 안주성의 신○ 협씨의 독녀 선행양과 결혼하시니, 선생의 청년시대와 목회시대에 크게 내조하신 현숙하신 부인으로 금슬 좋게 함께 나이를 먹으면서 함께 3남1녀의 자녀를 두셨다. 맞아들 진형은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요절하였고, 둘째 아들 진경(신학생), 셋째 아들 진섭(미술가), 그리고 딸 진주 (미국유학생, 물학物學 연구중)이 있다.

선생께서 15세에 초인招引이라는 군속郡屬 (지방 벼슬로 추정) 으로 있으면서 몸파는 기생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지만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하니 그 입지의 굳음을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선생께서도 26세의 혈기왕성하던 때에 당신에게 ○도道 (뭔지 모르겠지만 개신교 개종전에 길선주 목사가 몸담았던 종교의 일종인듯. ○는 파악불가능한 한자) 로 배우는 여제자에게 실범失範 (알아서 해석하시라고 원문의 한자표현 그대로) 한 적이 있으셔서 이후에 마음 아프게 울으셨다.

2. 선생의 청년시대

선생이 16,17세 어간에 평양에서 상업을 경영하여 보았으나 하늘이 종교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선생에게 상업이 맞을 리가 없어 상업은 ○경실패하고 친구 여러 명과 더불어 평양부근 용악사에 들어가서 수도하다가 중병이 걸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가하였다.

19세때부터는 고칠 수 없는 선생의 염세증은 도를 더하여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세상과 인생을 탄식하면서 세월을 보내던 중에 선생은 어느 밤 꿈속에서 관공關公_(무속과 도교에서 신으로 모시는 삼국지의 관운장을 뜻하는 듯)_ 과 보정대사保精大師와 다른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다른 한 사람이 선생에게 말하기를 을밀대로 가보라 하는 것이다. 선생이 꿈에서 깨여 이상하게 여기던 중에 을밀대로 가본 즉, 인천사람 이 서방과 함경도 사람 김순호 (후에 알게 된즉, 그는 창일거사創日居士이다) 라 하는 두 사람이 경파루에서부터 따라 오는 것이다. 이 서방이 선생을 향하여 묻기를 "당신은 어찌 시중 청년으로 청춘행락을 따라 놀러 다니지 않고 이렇게 적적히 지내는가?" 한 즉, 김순호는 말하되 " 이 청년은 세상에 뜻이 없고 마음이 도에 있으니 어찌 청루에서 놀겠는가?" 하는 것이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 곧 창일선생의 제자가 되기를 구걸하여 최치량 여관에서 다시 찾아 따라가기를 원한 즉, 창일거사는 선생에게 신차력주문을 줌으로 선생이 이것을 받아가지고 대성산 두타사에 들어가서 주문을 통독한 지 나흘째에 몸이 떨리고 영이 떠오르는 체험이 되어 이레만에 귀가한 즉, 중병이 떨어지고 기력이 강건하여지니 이것이 선생의 수련의 기초이었다.

그 후에 선생은 평양에 거하는 선도仙道 스승 장득한을 찾아 선도를 수련하기 시작하여 옥경玉經을 배우고 구령삼정九靈三精 주문을 외우며 또 육정육갑술六丁六甲述과 육경신六庚申을 수련하여 장량張良의 도인법道引法과 소강절정좌법昭康節靜坐法과 신차력神借力과 수차력水借力과 약차력藥借力 등을 차제로 수련하였다. 19세로 29세까지 자주 입산 수련할새 대성산 두타사와 상산 백운암과 자산 안국사에서 매년 때로는 21일, 때로는 49일, 때로는 100일짜리 기도를 거듭하면서 밤을 새면서 수련할 때 촛불로 손가락을 지저가면서 不窮不休로 정진하였으니 선생의 학성學誠과 굳은 의지는 다른 종교 수련시부터 남보다 뛰어났다.

선생은 마침내 선술과 선법에 통달하여 다가올 일을 예언하여 맞추는 일과 기이한 일을 (행함이) 적지 않은지라. (자신의) 부인에게 시술로 주문을 읊어본 즉, 부인이 앉은 자리에서 50척을 뛰고 선생 자신에게 시험하여 보아도 기력이 배가되었다. 지금 도 선생의 복부와 팔뚝은 철같이 굳은 장사이다. 이와 같이 선생의 선술의 소문이 널리 퍼져 찾아와 배우려는 사람이 많았다. 김종섭 (목사), 김○성씨 (목사)는 다 이때 선문仙門에서 사귄 오랜 친구로 함께 후일에 그리스도안에서 형제가 된 것이다. 선생의 심령은 선술의 통달로써 만족할 수 없어 진정한 무엇을 요구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만한 성공에 자만하였으련만 더욱 참진리를 추구하는 것에서 선생의 심령의 위대한 점이 있었고 주의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3. 선생의 새로운 삶

선생이 선교사 마포 박사와 지면이 있어서 김종섭씨를 박사에게 교제를 소개하였더니 김종필씨가 마침내 예수교에 입신하였다. 이것을 알고 선생은 대노하여 "내가 세상을 평정하는 날이 오면 서학에 변심하는 김씨 같은 자는 처단할 것이다" 하고 서언까지 하여 기독교를 맹렬히 반대하였다.

선생이 갑오년 성천벽란 (갑오농민전쟁을 지칭하는 듯) 때에 차력 제자 이지억에게 자금을 얻어 가지고 선문 제자 이정식과 평양에서 다시 상업을 경영할 때에 김종섭씨가 내방하여 전도 하고 책 한 권을 건냈는데, 중국인 이모가 아편중독자였다가 회개하고 신자가 되었다는 자서전이었다. 선생이 이 책을 일고 "나 같은 선사仙師에게는 아편쟁이 회개록은 소용이 없다" 라고 물리쳤다. 김전도사는 다시 선생에게 장원량우상론張元兩友相論이라는 책을 건내니 선생이 그 책을 읽고 다소 감동한 바가 있었다.
선생의 심공心工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은 심월관心月觀이오 또 삼령주문三靈呪文을 염독하니, 삼령이란 상천령보천존上天嶺寶天尊, 태청도덕천존太淸道德天尊, 뇌성보화천존雷聲寶化天尊 삼위천존을 합하여 구천응원뇌성자화천존九天應元雷聲寶化天尊이다. 이를 이미 알고 있는 김 전도사는 선생에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권한 즉, 선생은 자신에게도 섬기는 삼령신군이 있으니 성삼위 하나님이 역시 삼령신군일지라 어찌 다른 하나님께 기도하리오 하였다. 김전도사가 살며시 웃으며 예수교의 진위를 알기 위하여 삼령신군 하나님께 기도하여 보라고 권하고 다시 천로역정 한 권을 건내고 간지라.

선생은 삼령신군에게 세상이 믿는 큰 도道인 예수도가 진도眞道인지 위도僞道인지 알게 하여달라고 기도한 지 여러 날에 선도가 영생의 도가 아닌 것이 의심이 났다. 당시 구도하는 선생의 마음 상태는 이러했는데, 위에는 층암절벽이고 아래에는 만경창파인데 이쪽과 저쪽이 일○이 드리워지는 중, 선생이 지금 잡고 올라가라는 줄 이편 줄은 썩은 줄임을 안 것과 같이 무섭고 두려운 생각이냐고 저편에 있는 줄도 든든하지 ?하는 의혹이 나는 것과 같은 것이 선생의 방황하는 심적 상태였다고 한다. 예수도를 믿으려고 하여도 그 역시 구원영생의 도인지 의구에 싸여 번민이 되어 주야불궁하고 식음이 불감하여 쇠약하여진 몸에 중병이 생겨 버렸다. 여기에서 선생의 구도심이 얼마나 강렬하였던 것과 입신의 노력이 얼마나 컸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이 이러는 중에 천로역정을 독파할새 기독교도의 신앙 경험의 과정에 크게 감동하여 눈물로써 책장을 적시었다. 믿기도 전에 존 번연의 위대한 심령의 눈물에 함께 우는 선생의 심령도 위대하다고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그때껏 하나님이 어떠하신 하나님임을 알지 못하였고 예수를 믿    을 마음도 일어나지 못하여 번민은 그냥 계속하는 중에김종섭 전도는 다시 내방하여 "삼령신군께 기도하니 어떠하오?" 묻거늘, 선생의 말이 번민이 난다 한즉, 김전도사는 그제야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기를 권하였다. 선생이 다시 말하기를 "인간이 어찌 하나님을 아버지라 칭하리오?" 한즉, 김전도사는 그러면 상제님이라 칭하고 상제님께 기도하라 가르치므로 선생은 다시 상제님께 "상제님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오랜 세월 지성껏 신봉하고 공부하였던 선도에는 의심이 나고 의로운 것 같은 예수도는 영생으로 가는 진리의 도인지 깨닫지 못하여 저는 심한 번민으로 죽을 지경이니 저를 살려주시옵소서" 기도한 지 사흘이 되었다. 만뢰구적(퉁솟소리만이 가득한 고요한)한 겨울밤이 새로 1 시즈음에 꿇어 업드려 "예수가 참구주이신지 알게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옥피리 소리와 같은 청랑한 소리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세 번 부르거늘, 선생이 더욱 두렵고 떨리어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업드려 "나를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방성통곡하니 그때에 선생의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라서 더욱 힘써 기도하였다.

근방에서 깊이 잠들었던 이정식은 선생의 기도소리에 놀라 깨어 전일 선생에게 배운 옥경玉經의 구령삼정주송九靈三精呪誦을 외우고 있었다. 이씨도 후일에는 그리스도 신자가 되어 영수시무領袖視務까지 하였다. 선생은 밤새어 기도하는 중에 기쁨이 충만하여지고 감사의 눈물이 샘솟듯 하여 여광여취如狂如醉(미친 것도 같고 취한 것도 같은) 마음 위에는 평화가 주장하셨다. 밝은 아침에 김종섭 전도사는 다시 선생을 내방하여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이날이 바로 주일임으로 선생은 김종섭 전도사와 함께 판동 예배당 아침공부 예배에 참석하니 교인들이 이상히 여기는 중, 예배인도하던 김 전도사는 처음으로 예배당에 나온 선생에게 기도하기를 말한 즉, 선생은 성령의 감동함으로 기도하매 교인들이 더욱 놀라고 감사하였다. 선생이 선문仙門에서부터 그리스도인되는 구도의 경로는 바울의 개심같은 이적이오, 선생의 새로운 삶의 획기적 변화는 고넬로와도 같은 점이 있다. 몇 년전에 미국에서 만국 주일공과 편집할 때에 "고넬료"를 가르치는 공과에서 선생의 입신록을 실례로 설명하여 세계의 신자들을 감동시켰던 바, 독일의 어떤 주일학교에서는 연보로 선생에게 정금呈金을 보냈던 일이 있었다.
Posted by 참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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